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파엘로 산치오 (문단 편집) === 우르비노 시기 === 1483년 [[우르비노]]에서 조반니 산티와 마자 디 바티스타 차를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우르비노에 라파엘로의 생가가 있다. 위치는 여기.[[https://goo.gl/maps/tAe7FXXrqBzDogqk7]]] 부친은 유명한 피렌체의 용병 대장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와 그의 아들 구이도발도의 궁정에서 배우고 소속되어 일한 미술가이자 시인이었다.[* 그가 지은 '우르비노의 공작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의 삶과 행적'이 있다. 그 안에 젊은 레오나르도와 페루지노도 언급된다고 한다. 조반니 산티의 [[:파일:Giovanni_Santi_-_Christ_supported_by_two_angels.jpg|그림]]도 전한다. 부다페스트 파인 아트 박물관 소장] 어린 라파엘로는 부친의 작업실에서 화가로 훈련을 시작했다. 1491년 모친이 딸을 낳다가 사망하였고, 부친은 금세공사의 딸과 재혼한다.[* 라파엘로는 새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1494년 부친이 사망하고 작업장을 물려 받았다. 11세의 라파엘로는 작업장 운영을 부친의 제자이자 협력자인 에반젤리스타 다 피안 디 멜레토에게 맡기고, 그의 도움으로 피에트로 페루지노의 공방에 들어가 도제이자 조수로 활동하였다. 다만 라파엘로가 페루지노 공방의 모범적인 도제가 아니었으며 공방에도 가끔 나타난 정도라고 주장하는 미술사가도 존재한다.[* 바사리는 부친이 경쟁자이기도 한 페루지노에게 어떻게 라파엘로를 보내게 되었는지 서술하고 있으나 다른 문헌에서의 근거는 없다고 한다.] 누가, 언제 보냈고 실제로 얼마나 배웠는지는 현재 확실하지 않으나 페루지노와 라파엘로는 분명히 접점이 있으며, 페루지노의 작업장에서 완성된 그림의 일부에 라파엘로의 손길이 닿아있음은 분명하다. 라파엘로가 의뢰받은 첫 작품으로 추정되는 것은 1499년에 그린 행렬용 깃발 그림 2점이다.[* 시타 디 카스텔로 의뢰. [[흑사병]]의 창궐과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깃발용이다보니 양면에 하나씩 그림이 있는 형태이다.] 17세 때인 1500년에 에반젤리스타 다 피안 디 멜레토와 함께 시타 디 카스텔로의 산타코스티노 교회 예배당 제단화를 제작하는 의뢰를 받았다.[* 이 계약서에 라파엘로의 이름은 에반젤리스타와 나란히 있으며 'magister(=master)'로 적혀있다. 견습은 끝났고 이제 자립한 화가가 된 것이다.] 이 제단화는 1789년 지진으로 파손되어 여러 조각으로 쪼개져 없어졌다가 4조각이 남아있다. 제단화의 천사 그림이 라파엘로의 것으로 여겨진다. 이때부터 성모자를 다룬 여러 그림을 그렸으며 이 주제는 인물 뿐 아니라 두 인물 사이의 애정을 다양하게 연출하는 창조의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1502년에 그린 '성 예로니모, 성 프란체스코와 함께 있는 성모자' [[:파일:Raphael_-_Von_der_Ropp_Madonna.jpg|그림]]은 핀투리키오의 장식적 특징을 참조한 모습이 보인다. 핀투리키오는 라파엘로의 친구였으며 시에나 두오모에 있는 프레스코화 '에네아 실비오 피콜로미니'의 밑그림을 그릴때 라파엘로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1503년에 ''''몬드 십자가 처형'''', 1504년에는 ''''오디 제단화(성모의 대관식)''''를 완성한다. 이 그림들은 라파엘로가 점차 페루지노 양식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보인다.[* 자세와 표정, 분위기가 페루지노 스타일과 다르다.] 이런 모습은 라파엘로의 특징인데 다른 화가의 장점을 흡수하여 자신의 것으로 체화한 후 한 발 더 나아간다. 이러한 특징은 일생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보인다.[* 선배이자 라이벌인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의 장점도 흡수한다.] 1503년과 1504년에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의 딸[* 우르비노 공작 구이도발도 다 몬테펠트로의 여동생]이자 소라 공작 부인이던 조반나 펠트리아에게 작품을 의뢰받는다. 두폭 제단화 '성 제오르지오와 용'[* 오빠 구이도발도에게 선물한 제단화. 구이도발도가 가터 훈작사단에 선출된 것을 기념한 것으로 추정.]과 '성 미카엘과 용'[* 남편과 아들을 기리는 용도로 제작함. 둘은 성 미카엘 기사단의 일원이었다.]이다. 우르비노 공작 가문은 라파엘로에 대한 후원을 지속적으로 해주며 자신들의 초상도 후대에 남기게 된다.[* 구이도발도, 그의 아내인 공작 부인 엘리사베타 곤차가, 구이도발도의 작위를 승계하게 되는 조카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 모두 라파엘로가 그린 초상이 전한다. 구이도발도는 1495-98 까지 피렌체의 용병대장이었다.] 라파엘로는 우르비노 궁정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공작 가문의 사람들 외에도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 훗날 로마에서 라파엘로와 재회하였고, 그 때 라파엘로가 그려준 초상화가 매우 유명하다.] 등 여러 사람들과 친분을 쌓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